책 소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소설, 국내 최초 번역 출간
세계 문학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소설로 알려진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의 『사티리콘(Satyricon)』이 국내 처음으로 번역․출간되었다. 네로 황제 치하의 로마 시대상과 인간의 욕망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해학을 담은 이 작품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서기 1세기 중엽에 쓰인 풍자소설이자 악한소설의 원형(原型)
▶ 황제나 귀족이 아닌 로마 서민의 실제 삶을 그려낸 최초의 사실주의 소설
▶ 외설과 신성모독을 이유로 2천 년간 은밀하게 읽혀온 문제의 베스트셀러
▶ 20세기 문학 검열 역사에서 고전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하버드 러브(Loeb) 클래시컬 라이브러리』, 『옥스퍼드 월드 클래식』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고전 시리즈 목록에 오른 필독서
▶ 노벨 문학상 수상자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대표작 『쿠오 바디스』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페트로니우스가 지은 장편 소설
▶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베스트셀러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의 모델이 된 소설
▶ 오스카 와일드, T. S. 엘리엇, D. H. 로렌스, 올더스 헉슬리, 헨리 밀러 등 위대한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인용된 작품
▶ 영화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최고 역작 「사티리콘」의 원작
▶ 20세기 북 일러스트레이션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노먼 린지의 희귀본 삽화 100컷 전체 수록
■ 주요 서평
고대 로마 시대에 쓰인 책이라고 하면 흔히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나 그리스․로마 신화 관련서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대에 쓰인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은 그런 것들과는 너무나 다른 문학이다. 신도 영웅도 아닌 보통 인간들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별히 뛰어난 것도 없는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을 등장시켜 그들의 욕망과, 네로 황제 치하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신곡(神曲)이 아닌 인간 희극을 쓰려고 한 발자크가 품었던 야심의 근원을 보는 듯하다. 게다가 시니컬한 목소리의 문체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무려 2천 년 전에도 이런 독창적인 문학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진다. - 하일지(소설가,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사티리콘』은 외설적이다. 하지만 현학자, 허풍쟁이, 얼치기 시인, 벼락부자, 탐욕적인 가난뱅이를 날카롭게 풍자함으로써 외설을 거뜬히 넘어선다. -《타임》
『사티리콘』은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 헨리 밀러(소설가)
『사티리콘』으로 말하자면, 우등생들 사이에서조차 인기가 높다. - 오스카 와일드(소설가)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은 당대의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 페데리코 펠리니(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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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로마 제국에 비친 현대의 자화상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막을 내리고 제정이 열리면서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는 황금기가 시작됐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종식되고 정치․군사적으로 안정되면서 부(富)가 넘쳐나고 문화가 꽃피었다. 하지만 로마 내부에서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바로 ‘물질과 욕망의 전쟁’이다. 귀족이 아닌 새로운 부유층이 등장해 상류 사회로 진입하고,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고, 모든 것이 돈과 권력을 따라 움직였다. 그로 인해 황제부터 서민까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탐욕과 허영이 팽배하여 부패와 타락을 불러왔다. 특히 1세기 중반 네로 황제 시절에는 이런 양상이 극에 달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고 경제적 급성장과 안정을 일궈낸 대한민국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대 세계의 모습이 2천 년 전 로마와 다르지 않다.
『사티리콘』은 네로 시대 로마인들의 삶을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주인공 엔콜피우스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갖가지 음란한 행각과 기상천외한 사건이 이어지는 가운데, 교육이 무너진 암담한 현실, 성(性)을 도구로 삼는 사이비 종교와 미신의 만연, 향정신성 최음제와 사치품의 유행, 고단한 하층민과 노예의 삶, 공무원의 부정부패와 권위 의식, 졸부들의 허영과 천민 자본주의, 고상한 척하는 지식인의 이중성, 돈을 얻기 위해 인육(人肉)도 먹으려는 인간의 황금 만능주의, 도덕의 몰락과 성(性)의 타락, 대자연과 운명의 힘 앞에 나약한 인간 등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펼쳐진다. 또 그 속에 네로 황제와 귀족들에 대한 저자의 간접적인 조롱과 풍자가 깊이 배어 있다.
『사티리콘』은 누가 언제 쓴 작품인가?
일명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Gaius Petronius Arbiter)라고도 불리는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Titus Petronius Niger)는 로마 시대의 정치가이자 작가이다. 출생지와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1세기 중엽에 로마 속주 비티니아의 총독과 집정관을 지냈다. 취향이 고급하고 세련되어 네로 황제는 취향 문제라면 뭐든 그가 동의해야만 가치를 인정했다. 그래서 ‘품위 판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페트로니우스가 정말 『사티리콘』의 저자인지, 『사티리콘』이 네로 시대에 지어졌는지에 대해서 르네상스 시대 이래 수세기 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페트로니우스가 1세기 중엽 네로 시대에 쓴 작품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원문에 등장하는 인명, 지명, 각종 문물로 미루어볼 때 시대 배경과 경제 상황이 1세기와 부합한다. 어투와 수사법도 1세기의 다른 작품과 일치한다. 특히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 지어지기 시작한 황금 궁전을 상징하는 표현이 등장하고, 페트로니우스가 66년 초에 죽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작품이 완성된 해는 65년이 거의 확실하다.
이번 번역에 사용한 『사티리콘』의 현존 원문은 부록을 제외한 본문만 141절 30,594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현존 원문은 전체 가운데 14권, 15권, 16권의 일부에 해당하며, 원본은 현존 분량의 열 배에 이르는 스무 권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원문은 소실이 많이 된 데다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중간중간 내용이 가감․수정되어 의미가 달라지거나 퇴색되었을 뿐만 아니라 15권인 「트리말키오의 연회」를 제외하곤 너무 단편으로만 남아 있어 연결이 잘 안 되는 곳도 많다. 그렇지만 현존 원문만으로도 원래 작품 전체의 구성과 특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자 화자(話者)인 엔콜피우스의 모험을 중심으로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는 어떤 때는 주역을 담당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관찰자로만 자리를 지킨다. 주인공의 전체적인 동선(動線)은 갈리아 지방 남부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남부를 거쳐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듯하다. 원문 소실로 인해 작품 줄거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남근 신 프리아푸스의 진노를 산 주인공이 이성애가 줄어들어 동성애에 집착하다가 다시 이성애를 회복하는 과정이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다.
현대의 『사티리콘』, 예술인가 외설인가
이 작품의 명성은 오래됐지만, 이유인즉 민망하게도 외서(猥書) 또는 음서(淫書)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여 남의 눈에 띌세라 몰래 필사한 후 검은색 염소 가죽으로 장정해서 가지고 다녔다. 그런 탓인지 이 작품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까지도 문학 작품으로서는 진지한 연구 대상이 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 왔지만 어느 프랑스인의 지적처럼 “페트로니우스의 작품을 읽기는 하나 인용하지는 않는다.”가 대세였다.
독일의 위대한 역사가 니부어는 이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추잡한 외설로 가득하다 하여…… 워낙 평이 좋지 않은지라 페트로니우스의 작품을 남몰래 읽다가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짐짓 점잖은 체하는 위선자들에게 옳다구나 싶은 기회를 만들어주기 십상이다.” 하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온갖 음란물이 넘쳐나는 시대를 사는 요즘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는 데 낯을 붉히거나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다. 게다가 『사티리콘』은 원래 외설을 목적으로 지어진 작품도 아니다.
하지만 『사티리콘』은 선정성 때문에 미국 법정에 오르는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1922년 뉴욕 할렘 법원의 찰스 오버웨이저 판사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음란한 부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다면 우리는 셰익스피어, 초서, 볼테르, 루소, 보카치오,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의 작품은 물론이고 심지어 『성서』에도 폐기 처분 판결을 내려야 한다.……『사티리콘』을 규제하는 것은…… 학생들에게서 로마인의 실제 삶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재판을 통해 『사티리콘』은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조이스의 『율리시스』 등과 더불어 20세기 문학 검열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덕분에 거의 1900년간 선정성과 신성모독 때문에 음서로 취급당해 오다가 드디어 고전으로서 세상에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현재 『사티리콘』은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의 『러브(Loeb) 클래시컬 라이브러리』,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의 『옥스퍼드 월드 클래식』, 펭귄 출판사의 『펭귄 클래식』을 비롯해 세계 유수의 고전 시리즈 목록에 올라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소설이자 악한소설의 원형
오랫동안 논란이 있어 왔지만, 문학사에서 『사티리콘』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소설이자 악한소설의 원형(原型)으로 꼽힌다. 작품 연대로 미루어볼 때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가 2세기에 쓴 『황금 당나귀』보다 100년가량 앞선다. 물론 『사티리콘』은 원문이 많이 소실된 탓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라틴어 소설로는 『황금 당나귀』가 가장 오래되었다.
문학 장르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사티리콘』은 ‘메니포스 풍자(Menippean Satire)’에 해당한다. 메니포스 풍자는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견유학파 철학자 메니포스(Menippos)가 창시한 문학 장르로, 대화체가 아니라 산문과 운문의 결합이라는 형식을 통해 비판적이면서 익살스런 내용을 담아냈다. 이와 같은 형식은 로마 풍자 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 시대의 풍자는 초기에는 다루는 주제가 광범위했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삶과 도덕에 대한 논평이 주를 이루었다. 메니포스 풍자와 기존의 풍자 사이의 차이로는 익살과 공상의 전통을 들 수 있다.
문학 취향이나 성격이 ‘전형’에 얽매이지 않았던 페트로니우스가 메니포스 풍자를 선택한 이유가 처음에는 이런 산문과 운문의 혼합, 느슨한 서술 방식 같은 이점 때문이었겠지만, 페트로니우스는 문재(文才)가 탁월하여 이런 속성에조차 얽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발전시켜 독창적인 메니포스 풍자소설인 『사티리콘』을 탄생시켰다. 그 새로운 변화의 요소란 바로 익살, 부도덕(천박함), 사실성, 개성적인 문체와 운율이다.
특히 2부 「트리말키오의 연회」는 풍자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기본 주제는 도덕이 아니라 분명히 취향이다. 천박한 과시욕을 앞세워 교양인인 척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지만 감상을 주체하지 못해 타고난 상스러움을 드러내는 벼락부자 트리말키오는 풍자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의 전형으로서 문학사상 가장 익살스러운 주인공 가운데 하나다.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고대 소설에서는 예외 없이 전형화에 의존했지만 페트로니우스는 이 벽을 뛰어넘었다. 「트리말키오의 연회」에서 오가는 대화는 해당 부류의 사교계에 대한 자신의 관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말하는 사람의 성격과 취향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비속어와 문법에 어긋나는 표현이 가득하다. 그래서 「트리말키오의 연회」는 당대 라틴어 구어에 관한 귀중한 증거 자료일 뿐만 아니라 익살이 넘치는 해학의 백미로 꼽힌다.
페트로니우스는 시공을 초월해 독자가 좋아할 장면과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뿐만 아니라 신화 속 또는 가공의 영웅을 등장시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엮어 내거나 상상력을 동원해 이상화(理想化)를 좇는 진부한 기존의 고대 작품들에서 탈피해 인간이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사실에 기대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그럼으로써 동시대인과 함께 호흡하며 진정한 고전으로서의 생명력도 갖게 되었다.
페트로니우스는 소설가로서 탁월하고 시대를 앞서가는 능력을 선보였다. 현대의 기준에서 보아도 그는 가히 자유로운 예술혼의 소유자라고 할 만하다. 요컨대 『사티리콘』은 해학과 사실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풍자소설이자 악한소설이다. 그러면서도 그 문학성을 몇몇 키워드로 완전히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고전이다. 물론 고대 로마 시대에만 한정되는 익살과 공상도 있지만 현대인의 시각으로 봐도 기발하기 짝이 없는 부분들이 산재해 있다.
페트로니우스와 『사티리콘』의 문화적 유산
『사티리콘』은 외설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고대와 중세 초기에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다양한 부류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수많은 문헌에 거론되거나 인용되었다. 하지만 『사티리콘』은 기본적으로 음서로 여겨진 탓에 그늘 속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다 보니 원본이나 정확한 필사본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사티리콘』은 중세를 거치는 동안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인용된 예도 줄었다. 12세기와 르네상스 시대에 발견된 사본 중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부분은 2부 「트리말키오의 연회」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티리콘』은 다시 많은 문인과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인용되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1891)의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를 『사티리콘』의 주인공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티리콘』으로 말하자면, 내가 알기로 (라틴어 원문이 아닌) 번역문으로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등생들 사이에서조차 인기가 높다.” 그가 죽고 나서 1902년 파리에서는 ‘서배스천 멜머스’라는 그의 필명으로 『사티리콘』의 영역본이 출판되기도 했다.
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헨리크 시엔키에비치는 『쿠오 바디스』(1896)에 페트로니우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 『사티리콘』을 그의 작품으로 묘사했다. 『쿠오 바디스』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엔키에비치가 『사티리콘』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빌려 왔는지 알 수 있다. 목욕탕과 연회 풍경 묘사, 노예 관련 서술, 각종 문물의 배치, 신화의 이용, 페트로니우스의 사고방식과 취향의 표현, 몇몇 주변 인물 설정 등 작품 곳곳에서 『사티리콘』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사티리콘』의 연대가 『쿠오 바디스』의 시대 배경과 겹치는 데다, 작품의 주인공이 페트로니우스이고, 아울러 『사티리콘』이 네로 치하의 시대상을 소설 형식의 산문으로 담아낸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일찍이 하버드 대학교에서 페트로니우스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T. S. 엘리엇은 『황무지』(1922)의 제사(題辭)에 트리말키오의 말을 인용했다. [사실 이 눈으로 병 속에 갇힌 쿠마이의 시빌라를 직접 보기도 했지요. 아이들이 그녀에게 “뭘 원하세요, 시빌라?”라고 물을 때면 그녀는 “죽고 싶어.”라고 대답하곤 했지요.] 여기서 쿠마이의 시빌라는 죽음보다 못한 상태의 황무지에서 생의 의의를 상실한 인간을 상징하며, 이는 『황무지』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엘리엇은 소장하고 있는 『사티리콘』 라틴어판에 꼼꼼하게 주석을 달아놓고 10번 이상이나 자신의 작품들에서 언급했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대표작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위대한 개츠비』(1925)의 출간을 앞두고 제목 후보로 ‘트리말키오’, ‘웨스트 에그(West Egg)의 트리말키오’를 놓고 고민했다. 왜냐하면 작품 속 주인공 개츠비를 트리말키오를 모델로 삼아 그려냈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의 초기 판본에는 ‘트리말키오’라는 제목이 달렸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는 아직도 이 제목으로 출판되고 있다.
미술 분야에서는 노먼 린지가 펜과 잉크로 그린 『사티리콘』 삽화 100컷이 대표적인 예다. 이 그림들은 몇몇 영역본에만 실렸는데 모두 한정판으로 출판되었다. 특히 1927년에는 그의 아들 잭 린지(Jack Lindsay)의 영역본에 실려 주목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삽화 원본은 저작권자인 작가의 후손들에게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본 한국어판을 내기 위해 출판사에서는 영미권의 유명한 고서점과 도서관을 수소문한 끝에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고서점에서 비교적 인쇄 상태가 좋은 잭 린지의 영역본을 구입해 최대한 되살려냈다.
영화계에서는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역작인 「펠리니․사티리콘」(1969)을 최고로 꼽을 수 있다. 펠리니는 이 영화가 나오기까지 30년간이나 페트로니우스의 원작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1939년 그는 파시스트를 풍자하기 위해 무대극으로 올리려고도 했다. 그러다 1967년 펠리니는 병상에서 회복되면서 페트로니우스의 원작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소실된 부분이 너무나 궁금해 그 부분을 영화로 되살려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펠리니는 자신의 모든 상상력과 창조성을 발휘했다.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내가 가장 공들여 만든 작품이다.” 그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해 꿈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독특한 영상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탄생한 영화는 제목 아래 달린 “페트로니우스의 고전을 자유롭게 각색함”이라는 설명처럼 페트로니우스의 원작과는 상당히 달랐다. 펠리니의 영화는 원작이 지니는 악한소설과 풍자소설의 특성은 살아 있으면서도 사실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티리콘』은 라틴어 원문이 많이 소실된 데다 비속어와 문법에 어긋나는 표현이 많아 번역이 어려울뿐더러, 소설로는 상업적 가치가 낮다고 여겨져 그동안 국내 학계와 출판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심지어 서구에서도 외설서로만 여겨지다가 고전으로서 제대로 대접받기 시작한 지 반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 『사티리콘』에 관한 연구와 재해석이 많이 이루어져 서구의 각종 학술서, 논픽션, 소설 등에 작품 전체 또는 일부가 언급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났다. 따라서 국내 번역서에도 종종 등장하여 소수나마 일부 번역자와 독자가 『사티리콘』에 관심이 보이고 있다.
독자가 영어 번역본을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20종이 넘는 판본들 간에 해석 차이가 적지 않고 대개는 별로 친절하지 않아 웬만한 독자는 백과사전을 포함한 참고 도서 서너 권을 옆에 두고 봐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 한국어판은 1년 반 동안의 작업을 통해 원문의 의미에 가까운 쉽고 부드러운 우리말 사용, 서양 고전에 문외한인 독자가 참고 도서를 찾아보지 않고도 잃을 수 있는 수준의 각주와 해설, 2천 년 전의 로마를 시각적으로 그려가며 읽을 수 있는 지도와 삽화 수록, 소실된 부분이 많고 얽히고설킨 원문을 현대 독자들이 읽기 쉽게 맺고 끊는 편집 등에 중점을 두었다.
목차
■ 차례
주요 등장인물
1부 푸테올리에서의 모험
2부 트리말키오의 연회
3부 에우몰푸스와의 동행
4부 크로톤으로 가는 길
5부 크로톤에서의 사랑
부록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저자 소개
■ 지은이 페트로니우스(Titus Petronius Niger)
일명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Gaius Petronius Arbiter)라고도 불리는 로마 시대의 정치가이자 작가. 1세기 중엽 로마 속주 비티니아의 총독과 집정관을 지냈다. 취향이 고급하고 세련되어 네로 황제는 취향 문제라면 뭐든 그가 동의해야만 가치를 인정했다. 그래서 ‘품위 판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일하고 즐겼지만 낭비벽이 심한 호색한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기 세계와 주관이 뚜렷했으며, 네로에게 무작정 충성하지도 않았다. 66년 정적(政敵)의 모함으로 자살을 명령받자 황제의 악행을 까발리는 글을 써서 네로에게 보냈으며, 연회를 열어 정맥을 끊은 채 친구들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다가 편안히 죽어갔다. 작품으로는 『사티리콘』과 시 몇 편이 남아 있다.
■ 그린이 노먼 린지(Norman Alfred William Lindsay)
화가, 조각가, 판화가, 삽화가, 모형 제작가, 작가로 활동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유명한 예술가. 1879년 빅토리아 주 크레스윅에서 태어났으며 신문과 문학 작품 삽화가로 두각을 드러냈다. 종교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보헤미안으로서의 개성과 취향을 솔직하게 표현했으며, 대부분의 작품은 신화와 문학을 소재로 했다. 그는 대단히 정열적이어서 1969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냈다. 전성기에 그는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 전까지 수채화를 그렸고, 점심 전까지는 에칭 작업을 했으며, 오후에는 정원에서 콘크리트 조각 작업을 했고, 저녁에는 소설을 썼다. 짬이 나면 며칠간 배 모형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쓴 소설 11권 가운데 아동용 판타지 『마법 푸딩』(1918)은 지금도 베스트셀러로 널리 읽히고 있다.
■ 옮긴이 강미경
이화여자대학교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번역서로 『헤밍웨이 vs. 피츠제럴드』,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 『유혹의 기술』,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 『최초의 아나키스트』, 『프랭클린 자서전』, 『아포칼립스 2012』, 『마르코 폴로의 모험』, 『고대 세계의 위대한 발명 70』 등이 있다.